손톱깎이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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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동문학의 큰 산 윤석중 선생이 1940년에 쓴 동시가 웃음을 머금게 하는 정겨운 그림을 만나 이토록 사랑스러운 책이 되었다. ‘넉 점 반’은 네 시 반이라는 뜻이다. 한복 차림에 짧은 머리의 귀여운 여자아이가 검정 고무신을 신고 어디론가 타박타박 가는 모습으로 시작하는 그림책. 시계가 귀했던 시절, 엄마가 가게에 가서 지금 몇 시인지 알아보고 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영감님이 “넉 점 반이다” 하고 알려주자 아이는 잊을세라 “넉 점 반, 넉 점 반” 되풀이하며 나온다. 이제 집으로 가야 하는데, 눈길 닿는 곳마다 재미있는 공간이 새로 열리고 아이는 그리로 빠져든다.
김동식 l 10년간 결근 한번 없이 주물공장에서 일했다. 2016년 한 커뮤니티 게시판에 창작 소설을 올리기 시작했고 2017년 `회색 인간'을 내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 `김동식 소설집' 등 다수의 책을 출간했다.
“아직도 작가가 꿈인 학생이 있다고?”
농담 반 진담 반의 이 말은 내가 실제로 들은 말이다. 하지만 많다. 아주 많다. 학교 강연을 다니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아이가 작가를 꿈꾸는 걸 보게 된다. 그러면 난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말한다. “작가, 참 좋은 직업입니다.”
직업이 작가인 사람은 그렇게 말해야 할 의무가 있다. 중간에 많은 생략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그렇게 생각해야만 그 일을 계속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작가가 꿈인 아이들은 수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말을 듣고 있다. “그걸로 먹고살 수 있겠어?”
사실 이건 잘 먹고 잘사는 요즘 작가들의 모습으로 얼마든지 반박이 가능하다. 하지만 최근 반박하기 힘든 말이 나와 버렸다. “어차피 인공지능(AI)이 소설 다 써주잖아?”
인공지능 패배주의. 꿈을 접기에 가장 효과적인 논리가 탄생한 거다. 작가뿐만이 아니다. 다른 모든 꿈도 저 논리로 좌절시킬 수 있는 세상이 와 버렸다.
“저렇게 말하면 전 뭐라고 말해야 돼요, 작가님?”
꿈이 흔들리는 아이에게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시니컬한 척, 현실이랍시고 패배주의를 말해주는가? 아니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소설을 잘 써도 작가를 대체할 순 없습니다. 걔가 모든 걸 대체해도, 우리 개인의 고유성을 대체할 순 없으니까요.”
가게 앞에서 물 먹는 닭 구경하고, 그 옆으로 먹이를 옮기는 개미 떼를 발견하고는 쪼그려 앉아 또 한참을 구경하고, 고개를 드니 보이는 잠자리 따라 팔랑팔랑 돌아다니고, 분꽃에 앉은 잠자리 잡으려다 분꽃 따 물고 놀고, 그러다 결국은 해가 꼴딱 져서 돌아왔다.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엄마의 어이없는 표정과, 따온 분꽃을 툇마루에 올려놓고 슬그머니 저녁상에 끼어 앉으러 가는 아이의 모습에 속절없이 웃음이 난다. 오래된 동시이건만, 시간을 잊어버린 이 아이처럼 우리도 그사이에 놓인 시간을 more info 잊고 추억에 폭 빠져든다.
전 세계 가정에서 발생하는 1년치 쓰레기는 20억톤(t)이다. 하지만 가정에서 나오는 쓰레기는 한 지역에서 배출하는 쓰레기의 10%도 안 된다. 가정보다 자원 생산 과정에서 더 많은 쓰레기가 배출되고 있다. 분리수거가 중요한 게 아니라 티셔츠 한 장을 위해 들어가는 7㎏의 원자재, 스마트폰 생산에 들어가는 200㎏의 원자재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거다. 저자들은 쓰레기가 생성된 순간부터 재활용의 순간 그 이후의 가치에 주목한다.
세상 만물이 놀잇감이고 동네가 큰 놀이터였던 어린 시절, 시간은 참 잘도 흘렀다. 호기심이 닿는 곳을 따라 헤매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훌쩍 가 있었다. 시간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기계적이고 수학적인 시간과 대비되는 창조적 ‘흐름’으로서의 시간을 논했다.
기계의 시간이 아닌 인간의 시간. 책 속 아이는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과는 다른 차원의 시간에서 노닌다. 자연이 이끄는 대로 느긋하게 보고 만지고 느낄 줄 아는 작은 인간. 호기심 많고, 여유롭고, 당당하다. 자고로 아이란 이래야 하지 않을까.
그림책을 끝까지 보면 알겠지만 사실 아이네 집은 가게 바로 옆이다. 코앞이면 닿을 거리를 구불구불 빙 둘러 집에 도착하고도 당당한 아이를 보면서, 쫓기듯 집과 학원을 직선으로 오가며 늘 주눅 든 듯한 요즘 아이들 모습을 떠올린다. 아이들에게는 지름길보다 에움길이 어울린다.
‘7살 고시’라는 희한한 말을 들었다. 일곱 살이면 아직 세상을 커다란 놀이공원처럼 느껴야 하는 나이다. 스크린만 쳐다보며 재미를 구하는, 마음이 가난해져 버린 어른이 쓸데없는 권위로 저 찬란한 시간을 방해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어린이를 앞에 둔 어른은 준수보다는 순수를 말하고, 경쟁보다는 경이를 감각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게 어른의 일이다.
실은 어른들도 호모 루덴스를 죄인 취급하는 사회, 놀이하는 인간을 도저히 참아주지 못하는 이 ‘분초(分秒)사회’의 피해자인지 모른다. 어른이 바쁘니 아이들도 덩달아 바쁘다.
시간을 ‘기계적으로 버텨내야 하는 연속된 숫자’가 아니라, ‘몰입을 통한 창조적인 흐름’으로 만들 수 있게끔 허락하고 지켜주는 사회가 필요하다. 빨리 마치라는 듯 재촉하는 마침표, 끈적이는 물음표와 뜨거운 느낌표는 분꽃 속에 잠시 넣어두고 작은 쉼표를 하나 찍어보는 건 어떨까. 넉 점 반. 그렇게 하루의 절반을 딱 접어 쉬기에도 좋은 시간이고, 그런 시간에 보기에는 더 좋은 작품이다. 시간은 숫자가 아니라 추억이고 몰입이며 생(生)이다.